(건강)중년의 심리
중년의 심리
평균 수명이 60세가 채 되지 않던 20세기 중반까지는 중년을 30세에서 50세로 보았다. 하지만 100세 시대에 중년은 45세에서 65세 정도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심리적 발달 측면에서 중년의 과제는 어떤 것이 있을까? 고전적인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중년은 청년기의 과제인 직업적인 안정과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다 키운 뒤 노년을 준비하는 시기다. 그러나 21세기의 중년은 직장과 가정에서 안정을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전히 부모에게 생활비를 받거나, 결혼이 여의치 않아 혼자 사는 이도 있다. 불안정한 직장 생활로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면 가족 간의 갈등으로 이어져 가정이 붕괴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해서 노년의 준비는커녕, 아직 이루지 못한 청년의 과제들을 처음부터 다시 하느라고 허덕이곤 한다.
설령 안정된 가정과 직업이 있어도 사춘기 자녀와의 갈등, 오래된 부부간의 해묵은 문제로 속마음은 청년보다 더 외롭고 상처도 깊다. 한편 나이는 계속 먹어 가니 노화로 체력이 떨어져 건강도 문제다. 또한 남녀를 불문하고 성호르몬이 저하돼 정서도 불안정하고 근육량과 골밀도가 줄어드는 갱년기가 찾아와 신체 변화에 적응하느라 힘에 부친다.
그럼에도 비교적 행복하게 중년을 보내면서 의미 있는 노년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할 줄 안다. 부모로부터 유산을 받거나 자녀에게 의존하지 않고, 본인의 능력 내에서 생활을 잘 꾸려 간다. 전업주부도 중년쯤 되면 남편 월급을 종잣돈으로 만들어 당당하게 노년을 준비한다.
둘째,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경력을 쌓는 청년기와 달리, 중년에 이르면 어떤 것을 버리고 계속 지닐지 구별하는 능력이 있다. 예컨대 돈이 있다고 한없이 물건을 사재기하든가, 자기반성과 공감 없는 권력을 추구한다면 그 지나친 욕심이 자신을 더욱 옭아매는 족쇄가 되고 만다. 물욕과 권력욕을 버릴 수 있는 이들은 중년이 되어도 크게 상심하지 않는다.
셋째, 관계에서 자유로운 태도다. 배우자건, 자식이건, 친구건, 동료건, 어떤 인간관계도 사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걸 내주어도 아까울 것 없던 자식이 결혼한 뒤 배우자와 새끼들만 챙기고 부모는 모른 체한다고 분노하는 중년은 결국 자식과의 싸움이라는, 이겨도 부끄러운 전쟁터에 나서는 것뿐이다. 세상없이 사랑했던 배우자도 중년쯤 되면 이런저런 일로 실망하거나, 아프거나, 세상을 떠나거나, 생각지도 않은 일로 이혼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청년기에 갖고 있던 인간에 대한 무한한 기대를 접고, 보다 현실적으로 관계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 중년에 꼭 필요한 과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경험하며 깨우친 것을 누군가에게 베푸는 태도다. 청년기에 내 것, 내 성취, 내 삶에만 집중했다면 중년기에는 주변을 살피고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갖는 것이다. 예컨대 젊었을 땐 내 자식만 생각했지만 이젠 보육원 아이들을 돌보는 중년 부부는, 다 큰 자식에 대한 집착 때문에 겪는 좌절감과 소외감을 느낄 여지가 없을 것이다.
또 학자로서 부단히 정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해 좌절했더라도 후학을 위해 열심히 배워 나누는 데 몰두하다 보면, 성취하지 못한 분노나 자괴감이 치유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일평생 뭔가 새로운 걸 배우고 깨닫는 것이 인생이지만 중년 역시 생각보다 배워야 할 게 참 많다. 특히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발전할 경우, 기존의 심리학적 성취 과제에 덧붙여 해야 할 숙제가 태산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배움과 변화 때문에, 주름살이 늘고 흰머리가 머리를 덮어도 내면에는 즐거움이 깊어질 수가 있다.
융 분석가인 폰 프란츠는 말년에 파킨슨병을 얻어 투병하다 세상을 떠나면서도, 자신의 몸이 쇠약해 의료진 앞에 무기력하게 맡겨진 모습을 감내하는 것 역시 인생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 바 있다. 중년은 다가오는 노년과 지나간 청년기의 추억 속에 있는 값진 과제들을 찾고 그 진가를 하나씩 음미하며 키워 나가는 시기인 것이다.
이나미. 정신과 전문의, 좋은생각 20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