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여행 이야기

강화도 나들길

딸기라때 2012. 9. 16. 21:39

강화도 나들길을 다녀와서

 

1. 일   시 : 2012년 9월15일(토)

2. 장   소 : 강화도 나들길 1코스(10km 정도)

3. 누구랑 : 마포구청기술관리소 직원 27명

4. 목   적 : 도시철도  동아리 Olleh Travel  창단 출정식

         - 역사문화길을 걸으며 자연과 함께 직원들간의 정보교류와 소통,화합을 목적과

          - 강화도 나들길에서 "청렴 워크샵 참여 및 봉사활동 참석

 

☞ 후기

 

  이번 도시철도 동아리 "Olleh Travel" 창단 출정식을 위해 지하철 6호선 합정역 버스정류장 3000번 버스를 이용하여 강화도여객터미널 오전 10시 30분 집합으로 강화도 나들길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공사 리무진버스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 운전기사분의 사정상 개인별 강화도에 모이기로 한것에 다소 어려움이 있었지만......

 

목적은 강화도의 역사문화길을 걸으며 자연과 함께 직원들간의 친목을 갖고 더나아가 강화도 나들길에서 우리 선조들의 나라를 지킨 투쟁의 역사를 갖은 역사의 흔적들을 볼수가 있었고, 또, 우리공사의 덕목인 청렴 워크샵을 갖으며 도시철도 동아리 출정식 시작을 하였다.

 

 

☞ 강화산성 [ 江華山城 ]

 

사적 제132호. 인천 강화군 강화읍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1232년 고려가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착공하였는데, 공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강화도로 천도하여 2년 후인 1234년부터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했다. 이 성은 내성(內城)·중성·외성이 이루어져 있는데, 내성은 현재의 강화성으로 둘레가 3,874자(1,174m), 중성은 둘레가 5,381m로 1250년에 쌓았고, 외성은 1233년에 지었다. 이 성들은 모두 흙으로 쌓은 토성인데, 중성의 위치는 선원면(仙源面)의 토성터인 것으로 추정되고, 외성은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길이가 3만 7070자(1만 1232m)였다. 그러나 1270년 다시 개경(開京)으로 천도한 후 몽골의 요청으로 헐어버렸다.

 

조선 전기에 규모를 축소하여 다시 축성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파괴되고, 1677년 강화유수 허질(許秩)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고려시대의 내성 규모로 돌성[石城]을 쌓았다.

 

서문인 첨화루(瞻華樓)는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이 세웠고, 남문인 안파루(晏波樓)는 쓰러진 것을 1973년에 다시 복원했고, 북문인 진송루(鎭松樓)는 원래 문루가 없던 것을 1783년 성을 개축할 때 세웠고, 동문인 망한루(望漢樓)는 200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암문(暗門) 4개소와 수문(水門) 2개소가 남아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다.

 

 

'제1코스' 강화버스터미널에서 집합하여 연미정을 거쳐 강화도 나들길을 시작한다.

단체사진과 청렴 선포식...▼

나들길을 탐방하면서 "봉사활동까지"...▼

강화산성에서 "올레 트레블" 선포식  ...▼

강화도 나들길은 강화도 주변 마을길을 지나야 한다...▼

진송루(鎭松樓)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강화산성 내성의 북문으로 고려 고종 19년(1232년)에 강화로 천도한 뒤 대몽항쟁을 위해서 흙으로 쌓은 강화산성 내성에 연결되었던 문이다.

 

조선 숙종 3년(1677년)에 강화유수 허질이 전면을 돌로 쌓고, 후면은 흙으로 개축 확장하기 시작하여 숙종 37년(1711년)에 강화유수 민진원이 34년 만에 강화산성을 완성하였는데 당시 북문에는 누각이 없었으나, 정조 7년(1783년)에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우고 진송루라고 하였다.

 

진송루는 주변에 소나무가 많이 있어 지어진 이름인 듯하다.

그 뒤 북문이 헐려서 석축 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강화여객터미널

 

 

 

 

 

 

강화도 드넒은 곡창지대 벼가 알알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오읍약수(五泣藥水) ▼

 

강화산성 북문(진송루)을 나서면 있는 오읍약수는 고려때 생겼다고 한다. 고려 고종이 1232년 강화로 천도하여 2년간에 걸쳐 내성과 궁궐, 관아를 건축하였다.

그때 많은 강화인들이 동원되어 북문을 건축하던중 날씨가 가물어 더욱 힘들었다 한다. 고종은 북문 앞에 제단을 쌓고 기우제를 올렸다고 하는데 하늘이 정성을 어여삐 보았음인지 제를 끝내려는데 하늘이 어둡기 시작하고 천둥까지 쳤다고 한다. 바로 그때 벼락이 큰바위에 떨어지며 물이 솟았는데 바로 지금의 약수가 생긴 것이다. 제를 지내던 모든 사람들은 “살았구나”를 외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오읍약수(五泣藥水)”라 부른다

 

점심 만찬..▼

대월초등학교에서 주문한 도시락으로 점심식사...▼

 

 

 

 

연미정 [ 燕尾亭 ] ▼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월곶리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서 물길의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갑곶(甲串)의 앞을 지나 인천쪽으로 흐르는데, 그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이곳은 강화10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자리로서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이 정자에 오르면 북으로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潮流)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자는 높다란 주초석(柱礎石)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정자 양쪽에는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이 정자는 고려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며, 1244년(고종 31)에 시랑 이종주(李宗胄)에게 명하여 구재생도(九齋生徒)를 이곳에 모아놓고 하과(夏課 : 여름철에 50일 동안 절에 들어가 공부하던 일)를 시켜 55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방어사로 큰 공을 세운 황형(黃衡)에게 이 정자를 하사하였으며, 현재도 황씨문중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곳은 민간인 통제구역(民間人統制區域, 民統線) 이북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현재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연미정 아래 군 내무반...▼

 

성곽너머 강 건너 북한 땅이 보입니다...▼

 

 

 

진송루(鎭松樓)에서

 

 

 

강도(江都) 북산(北山) 진송루(鎭松樓)에서

풍문에 들은

옛 북문(北門) 밖 여제단(厲祭壇)을 찾는다.

 

성벽에 돋아난 푸른 이끼에게 물어

 

“그대는 아는가”

 

병들어 죽어간 주인 없는 혼백을 달래던 그 제단을

 

헐고 쌓고 무너지고 쌓이는 사이

 

“몇 번이나 눈길[視線]을 잃었느니라”

 

이름 없이 죽어간 호국의 원혼 드나들던 돌담

 

맑은 날이면 훤히 보인다는 휴전선 너머

 

안개에 가린 송악산 이름뿐이듯

 

두견화 피어나는 망울마다 귀촉도 붉은 울음

 

차라리 집에 돌아가 꿈속에나 들어

 

기우기청(祈雨祈晴)이라

 

쾌청한 푸른 봄비나 빌고 빌어 볼거나.

 

 

* 여제단(厲祭壇) : 강화도 내성 북문 밖에는 주인 없는 병질에 간 혼백을 위안하는 제단인 여단(厲壇)이 있어 매년 춘추로 제행을 드렸다고 한다.

 

 

** 기우기청(祈雨祈晴) : 강화에서 북산을 비롯하여 전군 6개소에 비를 빌고 맑아지기를 고대하는 기우청 제단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