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나의 이야기

토론의 기술

딸기라때 2019. 7. 6. 11:07

비판할 땐 상대의 강점 파고들어라, 약점 탐닉하면 하수 

진지한 토론 없으면 학계 타락

중립은 무관심·무지성 선언 의미

그렇다고 막말=비판 혼동 말아야

 

강점 없을 땐 ‘용기’ 칭찬하면 그만

비판은 되도록 간단명료해야

건설적 제언·대안 함께 제시를

 

[김영민의 공부란 무엇인가] 토론의 기술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어떤 주제에 대해 자신이 처음 연구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 누군가 그 주제 혹은 그와 유관한 주제에 대해 이미 연구한 적이 있다. 기존 연구가 충분히 만족스럽다면, 새삼 연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 새삼 그 주제를 연구한다면, 그는 기존 연구를 수정 혹은 보완하고자 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새로운 연구는 ‘비판적’이다. 학술 논문에 종종 포함되는 연구사 검토는 그러한 비판을 위한 장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 연구사 검토를 생략하는 논문은 숙제를 하지 않은 것이다.

 

비판은 글뿐 아니라 말에도 필요하다. 누군가의 구두 발표가 완전무결하다면, 그에 대해 찬사를 연발하며 폭죽을 터뜨리면 된다. 그러나 완전무결한 발표는 현실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기에, 비판적 논의가 필요하다. 심각한 문제가 없는 경우에도, 미래의 연구를 위해 제언을 하거나, 폭넓은 함의를 함께 음미해볼 수 있다. 논문 발표에 따르는 질의 토론 시간은 그러한 비판적 검토를 위한 장이다. 질의 토론 시간이 없거나 소략한 발표회는 진지한 토론의 장이라기보다는 쇼나 사교의 장에 가깝다.

 

공격성 드러내는 건 미성숙하기 때문

 

진지한 비판과 토론이 없을 경우, 학술의 장(場)이 타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원로를 존경한다는 미명하에,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인다는 미명하에, 동료의 사기를 진작한다는 미명하에, 학술적 엄격성 자체를 훼손하는 ‘덕담’들을 다 받아줄 경우, 해당 학술의 장이 결국 도달한 곳은 뻔하다. 세상 어딘가에는 덕담으로 일관하다가 망해버린 학계가 있을 것이다. 시시한 덕담을 하느니 차라리 침묵을 지킨다고 해서, 책임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학술 토론의 장에서 느닷없이 영세중립국 선언을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 중립이 어떤 지성을 드러내는 신중함(prudence)인 경우라면 모를까, 그저 중립을 선언하는 것은 무관심 혹은 무지성의 선언과 다를 바 없다. 중립을 선언하는 거 말고는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중립을 선언했다기보다 지성의 영세 중지를 선언한 것이다.

 

비판이 필요하다고 해서, 막말을 비판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밉상이면, 그의 주장뿐 아니라 숨 쉬는 모양새까지 비판하고 싶을지 모른다. 상대가 얄밉다는 이유 하나로

 

인신공격을 일삼거나, 달을 향해 짖는 개처럼 게걸스럽게 비난을 쏟아내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공격적인(aggressive) 논평과 예리한(sharp) 논평은 다르다. 예리한 비판을 제기할 순간에 불필요한 공격성을 드러내면, 그것은 미성숙의 표지일 뿐이다. 비분강개할 장소는 따로 있다. 맛없는 디저트를 파는 카페랄지, 마스킹을 하지 않는 극장이랄지. 학술적 토론의 장에서 감정의 표출은 그다지 쓸모가 없다. 자기 기분이 상했다는 것과 상대 주장이 틀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사안이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활력 있는 학술의 장을 유지하려면 비판을 하는 사람이나 비판을 받는 사람 모두 일정한 덕성이 필요하다. 비판을 받는 사람의 경우 어떤 덕성이 필요할까? 일단 정당한 비판을 감내할 수 있는 정신력이 필요하다. 비판을 받을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신과 ‘한 패거리’로 모든 토론자를 채우거나 하는 것은 용렬한 짓이다. 제대로 된 비판이라면, 그것은 자신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의 표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발음이 약간 비슷하다는 이유로 당신이 ‘막스’ 베버와 칼 ‘막스’의 주장을 혼동한달지,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혼동한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비판하지 않고 조용히 그 자리를 뜰 것이다. 그 침묵이 어찌 당신에 대한 존중이겠는가. 상대를 무시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져주거나 침묵하는 것이다. 상대를 존중하는 사람만이 비판한다.

 

물론 비판을 감내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비판을 접하면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나머지 그 비판을 수용하려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주장에 대한 비판과 그 주장을 한 사람에 대한 비판은 분석적으로 구별되는 것이지만, 양자를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래서 상대의 정당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혼동할 수도 있다.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 느껴진 나머지, 화장실에 들어가 울고 싶을 수도 있다. 비판을 수용하면 자신이 손해를 본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억지를 부려서라도 반론에 나서고자 하는 욕망이 휩싸일 수도 있다. 아, 저 비판을 뜨거운 기름에 튀겨 버리고 싶다! 아, 저 비판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하고 싶다! 손해배상 청구를 하고 싶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 자체보다도, 주장에 대한 비판에 대처하는 자세야말로 자신이 용렬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만천하에 드러낼 기회이다. 결함으로 인해 삶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그 결함을 인정할 때뿐이다.

 

비판을 하는 사람은 어떤 덕성이 필요한가. 첫째, 상대 주장의 약점보다는 강점과 마주하여 비판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 상대의 핵심 주장에 강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보인 약점에 탐닉한 나머지 그것을 상대의 ‘본질’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하수들일수록 상대의 하찮은 약점에 탐닉한다. 형사물에서 시체가 등장하면, 그 시체를 둘러싼 드라마에 집중해야지, 시체 역을 하는 배우가 얼마나 꼼짝 않고 있는지만 집요하게 살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무런 강점도 없는 경우는 어떡하냐고? 완벽하게 못생긴 사람이 없듯이, 완벽하게 오류로만 점철된 주장은 드물다. 기를 쓰고 상대 주장의 강점을 찾아내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단점을 찾아내 즐기는 패티시가 있다고 오해받을 수 있다. 상대의 주장에서 강점을 영 찾을 수 없으면, 이토록 형편없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용기 자체를 칭찬하면 된다.

 

“비판만 하는 건 어떤 바보라도 할 수 있어”

 

둘째, 비판을 불필요하게 길게 할 필요는 없다. 특히 자신의 평소 입장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것은 금물이다. 주인공은 당신의 비판이 아니라 상대의 발표이다. 특히 시간이 한정된 발표회장에서는 간명하게 말하는 것이 좋다. “당신의 발표는 길고 생각은 짧습니다”랄지. 그러나 비판을 간명하게 한답시고 가능한 대안을 생략해서는 안 된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비판이나 비난, 불평만 하는 것은 어떤 바보라도 할 수 있고, 대다수의 바보가 그렇게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가능하다면 건설적인 제언이나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이 좋다. 동시에 상대방의 주장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자신의 대안이 곧 타당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멍청한 주장에 대해 더 멍청한 비판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상대의 주장을 검토할 때 보이는 엄격성을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도 유지하는 것이 좋다.

 

셋째, 불필요하게 공격적인 언사를 남발해서는 안 된다. 작업에 대한 평가와 작업자에 대한 평가를 가능한 한 구분한다. 그래야 비로소 상대도 건설적인 비판과 인신공격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상대의 주장이 틀렸다고 해서, 상대를 꼭 쓰레기라고 공개적으로 부를 필요는 없다. 잔인한 것은 이 우주만으로도 충분하다. 중국 쓰촨성 루구호 주변에서 사는 모소족 사람들은, 상대가 싫으면, “너는 나에게 이 나뭇잎처럼 가볍다”는 뜻으로 손바닥 위에 나뭇잎을 올려놓는다고 한다. 이제부터 논문 발표장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형편없는 논문이 발표되면, 그에 대해 폭언을 퍼붓는 대신, 손바닥 위에 나뭇잎을 올려놓는 거다. 나뭇잎이 없다면 무말랭이라도 올려놓는 거다.

 

끝으로, 자신의 주장이나 비판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고 해서, 크게 상심할 필요는 없다. 활자화된 주장은 똑똑함이나 멍청함을 대대로 홍보하는 최고의 수단이니, 언젠가는 자신의 똑똑함이나 멍청함을 제대로 이해해 줄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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