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시험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수능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물으라 하지 않겠다. 그렇게 묻기에 당신들은 너무 힘들고 지쳤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그렇게 위로하지도 않겠다. 청춘이 아파야 할 이유가 없고, 청춘만이 아파야 할 이유도 없다. 수능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도 않겠다. 어떻게 지금의 세상에서 수능이, 입시가, 대학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겠는가. 지금까지 시험공부에만 매달렸으니 앞으로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공부를 찾아보라 하지도 않겠다. 경쟁은 지속될 것이고, 새벽부터 밤까지 지쳐 돌아올 당신들에게 새로운 공부를 요구할 수는 없다. 우리 대부분은 과로사하거나 아사하거나 치킨집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시험 뒷담화나 하자.
정신과 전문의가 들려준 이야기다. 본과 첫해에 과장님이 인사말을 하면서 물었다고 한다. ‘여러분, 좋은 배우자를 얻는 비결이 무엇인지 압니까?’ ‘아! 정신과에 오면 이런 보너스도 있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과장님이 답을 알려주셨다. ‘운이 좋아야 합니다.’ 시험도 마찬가지다. 우선 머리가 좋아야 한다. 그런데 그 머리, 내가 결정한 것 아니다. 노력하면 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누구는 1시간만 해도 되는 걸 나는 3시간 해야 따라갈 수 있다면 시스템이 잘못된 것이지 왜 노력을 덜 했다고 타박하느냔 말이다. 게다가 입시철이 되면 모두 전력투구해버리는데 그걸 노력으로 극복하는 게 별로 가능하지도 않다. 사실 노력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것이다. 책상에 앉아서 문제풀이를 오랫동안 할 수 있는 것도 타고난 기질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지 어떻게 억지로 되는 것이겠는가. 억지로 앉아 있은들 효율이 오를 리도 만무하다. 머리를 따라잡을 수 있는 노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그 노력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부모나 조부모’의 노력이다.
한국은 아마도 전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시험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나라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 제도를 능력주의,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라고 하는데, 아니다. 1958년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능력에 따라 불평등이 심화되는 암울한 미래를 설명하기 위해 이 용어를 썼을 때, 그 메리트는 그래도 꽤 넓은 의미의 능력이었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오로지 단 하나의 능력만이 필요하다. 요령을 터득하여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푸는 능력이다. 이것은 메리토크라시가 아니라 시험주의, 곧 테스토크라시(testocracy)다.
시험이란 제도는 공정하지도 않지만, 설령 그것이 공정하다고 한들 최악의 제도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은 극도의 긴장과 경쟁 속에서 인간성을 파괴할 뿐 아니라, 그 결과를 통해 한 사람의 능력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도 거의 없으며, 잘해야 가장 운이 좋은 인간들에게 더 큰 운을 가져다줄 뿐이다. 심지어 이 과정을 통해 운을 자신의 능력이나 권력으로 착각하게 되면 재판거래 같은 것이 생겨난다.
볼테르 같은 계몽주의자들조차 시민권이 지식, 재산, 교육의 정도에 따라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루소는 이에 결연히 반대했다. 좋은 시민이 되는 데 필요한 것은 진실함, 소박함, 불의에 대한 용기, 동료애라고 말이다. 국어 31번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과 좋은 시민이 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시험으로 판사와 공무원을 뽑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럼 뭘로 뽑을 거냐고? 그 답을 회피해서 세상이 이 꼴이다. 그 대안을 찾기 전까지, 우리 사회는 결코 개혁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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