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잘못이 나의 감정을 해칠 때
세상에는 옳고 그름으로 나뉘지 않는 일들이 존재하는 동시에 분명히 틀린 일들도 존재한다. 정말 틀린 일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 (중략)
심리학자 로라 톰슨은 용서와 화해는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용서는 개인의 내적 과정이지만 화해는 관계적 과정이다. 나에게 해를 입힌 상대를 떠올리기만 해도 혈압이 솟구치고 심장이 쿵쾅대는 내적 반응을 가라앉힌다는 게 꼭 그와 다시 화목하게 잘 지내보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용서는 봐주기나 책임을 면제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정의 집행과도 별개이다. 연구에서는 범죄 피해자들의 용서는 보통 다음과 같은 양상을 보인다고 밝혔다. “당신을 용서한다. 당신이 이 기회를 헛되이 하지 않고 겸허히 죗값을 치르고 회개해서 새 사람이 되길 바란다.” 즉 피해자가 상대에 대한 개인적인 울분이나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이로부터 해방될 뿐, 죄를 진 사람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죄를 시인하지도,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는 행동도 전혀 보이지 않는 상대에 대해 진심 어린 용서를 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연구에 따르면 용서를 받는 데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사건의 중요성이나 피해의 정도를 축소하지 말고 그 일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얼마나 충격적이고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피해자의 경험과 관점에서 이야기할 것. 둘째,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처럼 자신을 사건과 상관없는 제3자처럼 포지셔닝하고 마치 피해자가 예민한 탓인 양 말하지 말 것. 셋째, 그 일은 분명 자신의 잘못과 책임임을 명시할 것. 진심 어린 사과와 책임지는 행동이 있을 때 진심 어린 용서가 나오는 법이다.
또한 타인에 대한 용서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 운명이나 불운같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한 용서도 존재하며, 이 셋은 보통 함께 나타난다.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은 많은 사람들이 ‘내 탓도 있지 않을까?’, ‘내가 조심했더라면 괜찮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는 등 미묘한 죄책감을 느끼며 자기 탓을 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네가 뭔가 했겠지”, “그러게 조심하지 그랬어” 같은 주변 사람들의 말도 피해자의 죄책감을 부추긴다. 이런 가운데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는 불안이나 우울 증상을 줄여주는 등 정신건강과 긴밀한 관련을 보인다. (중략)
로라 톰슨은, 용서는 결국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기존의 가정과 기대, 세계관이 무너졌을 때 나와 상대방,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정립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불의한 사건과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으로부터 감정적으로 독립하는 것, 그들에게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의연함을 되찾고 자신의 삶을 다시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용서란 부서졌던 내 삶과 감정을 동여매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 아닐까?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박진영 지음/ 호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