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산행정보
검단산은 등산로 정비가 잘 되어있고 그리 높은 산도 아닐뿐더러, 산행코스도 어렵지 않아서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하기에 좋은 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애니메이션 고등학교를 산행 들머리-산행이 시작 하는 곳으로 잡고 오르는데, 코스가 길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오르기엔 아이들이 쉬 지칠 수도 있다. 등산 코스는 짧은 곳으로 하산은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잡아 가족 모두에게 즐거운 기억이 남는 산행을 해보자
산곡초등학교 코스
코스가 검단산의 가장 일반적인 산행코스이다
창우동 베트남참전기념탑을 지나 검단산휴게실길로 1.3km정도 올라가면 유길준(고당)묘가 나온다.고당묘까지는 길이 넓고 경사가 급한편이다. 입구에서부터 오라오며 점점 거친 숨을 몰아쉬게되어 산행의 가장 힘든다는 사점이 오게 된다. 고당묘를 지나면우측 경사로를 따라 오르면 폐쇠된 창우동으로 내려가는 길과 북쪽 능선을 오르는 길이 나온다. 길을 따라 10분 정도 올라가면 창우강변으로 기는 길과 정상가는 삼거리가 나오고, 이곳 삼거리에서는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쉬어가기 좋다 암석능선을 따라 오르면 시원하게 한강과 미사리 시야가 보이는 전망대가 나온다.전망대를 지나 산책길 같은 오솔길에는 군데군데 소나무들이 솔향기를 뿜어낸다.정상에서 북동쪽으로는 팔당호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멀리 양평의 풍광이 좋다.동남쪽으로 고추봉을 지나 용마산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남한산성이 보인다.서쪽으로는 관악산과 북한산 서울시내 하남시내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정상을 지나 산곡초등학교 방향 계단을 내려오면, 우측으로 호국사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고 직진한다. 정상에서 0.5거리에 윗배알미와 용마산 등산로와 산곡초등학교로 내려가는 3거리가 나온다.작은 안내판에는 윗배알미 방향만 표시되어 있다그곳에서 400미터 거리에 곰터약수가 있고, 악수터 부근에는 높은 갈대가 무성하다 갈대밭에서 오른쪽새능가는 길과 왼쪽 산곡초로가는 길이 나온다. 100미터 내려가면 또 약수터가 나온다. 약수터는 위쪽 약수보다 맛이 덜한것 같다 약수터를 지나 경사급한 길을 내려오면 계곡을 따라 통일기원탑과 무병장수기원 돌탑이 있다 돌탑에서 20분거리에 산곡초등학교가 나온다
2. 등산코스시간
▲ 1코스 (2.6km, 1시간 25분)
산곡초등학교⇒통일기원돌탑⇒곰터약수터⇒정상
▲ 2코스 (3.1km, 1시간 30분)
애니메이션 고⇒현충탑⇒곱돌 약수터⇒정상
▲ 3코스 (3.5km, 1시간 40분)
창우동⇒유길준묘⇒전망바위⇒정상
▲ 4코스 (2.1km, 1시간 10분)
아랫배알미(팔당댐 수자원공사)⇒감시초소⇒정상
▲ 5코스 (3.5km, 1시간 30분)
윗배알미(팔당댐)⇒송전탑⇒삼거리⇒정상
▲ 용마산 연계산행
정상⇒산곡초고 하산길 삼거리⇒고추봉⇒용마산⇒거문다리
▲ 대중교통
서울역 : 9301 (광화문, 종로경유 좌석버스) 잠실역(8번출구) : 30-3, 30-5, 341
동서울터미널 : 15-3,112,112-1천호역(6번출구), 강동역(4번출구) :30-3, 341, 9301, 112
▲ 도로정보
중부고속도로⇒하남IC진출⇒팔당대교방향⇒애니메이션 고교
올림픽도로 미사리방향⇒팔당대교 아래 우회전⇒애니메이션고교
유길준 묘소
유길준(兪吉濬, 1856년 양력 11월 21일(음력 10월 24일) ~ 1914년 양력 9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외교관, 작가이며 대한제국의 정치가·개화 사상가·계몽운동가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자는 성무(聖武) 또는 성무(盛武), 호는 구당(矩堂), 천민(天民), 구일(矩一)이다. 근대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의 한사람이며, 개화파의 이론가로서 수많은 저작물을 발표하여 개화사상을 정립하였다. 그는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 체제와 합리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전근대적인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의 변화,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맺어지자 이 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고, 전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목적으로 흥사단을 조직했다.
1870년(고종 7년) 박규수, 강위, 유대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박규수 사후에는 유대치와 강위, 오경석에게서 수학하였다. 1871년 향시에 장원하였으나 번번히 대과에 낙방하고, 당시 과거 시험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1881년 일본에 파견되는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다녀왔으며 이후 일본과 미국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갑신정변 실패 직후 귀국하여 6년간 감금당했다가 풀려나 김홍집 내각의 내무부협판과 내무부대신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 당시 단발령을 전격 추진하였으며, 양력 사용, 신식 학교 건설 등의 개혁정책을 수립했다. 갑오경장과 을미개혁 이후 제도 개편을 추진하다가 아관파천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뒤 고종을 퇴위시키고 의친왕을 추대하려는 정변을 꾸몄다가 발각되어 실패했으며, 1900년(광무 3년) 한국으로 환국을 기획하다가 외교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4년간 구금당했다.
1905년(광무 8년) 11월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의 조선병합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반대하였으며, 교육과 계몽의 필요성을 외쳤다. 이후 계산학교 등의 학교를 설립하고 노동야학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와 국민 계몽 등의 활동을 하였다. 국내 산업 자본의 육성을 위해 국민경제회, 호남철도회사, 한성직물주식회사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흥사단의 조직과 1909년의 한성부민회와 청년학우회 등의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나, 한일합방을 막지는 못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의 한일합방 역시 반대하였으며, 한일 합방 무효 시위를 기도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후 총독부의 회유와 일본 정부가 준 작위를 거절하고 여생을 마쳤다. 그는 각종 저서와 계몽 강연을 통해 서구의 의학, 교육 등 신문명의 존재와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을 소개하였다. 사후 안창호에 의해 애국자이자 이상적인 정치 지도자로 추모되었다.[1]
1895년(고종 32년) 근대 최초의 한글 문법서이자 국어사전인 조선문전을 발간하였고, 10년간의 수정과 증보 후 1909년(융희 3년)에는 대한문전으로 재간행하였다. 또한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소개한 《보로사국 후례대익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와 이탈리아의 통일을 소개한 《이태리 독립전사》등의 책을 집필하였다.
그는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암살당하자 조선인 고위 협력자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그러나 친구이자 후배였던 윤치호에 의해 그 자신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출신 주요 공모, 협력자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다.[2]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 노론 실학파 학자 박규수(朴珪壽), 개화 사상가 유대치, 오경석(吳慶錫), 강위(姜瑋) 등의 문하생이었다. 한성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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