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나의 이야기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딸기라때 2019. 11. 26. 09:30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샘, 내가 ‘삶을 온전히 느끼며 사는 법’에 대한 감동적인 수업을 받은 것은 지난 번 네 생일이었다.

 

네 아빠는 네가 골프를 제법 잘 친다고 몇 달째 자랑을 했다. 네가 아예 골프에 흠뻑 빠진 것 같아 골프채를 세트로 사주었다고. 네가 골프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고 난 흐뭇했다. 그런데 네 생일을 앞둔 어느 날, 너희 부자가 골프장에 같이 가자며 날 초대했을 때는 마음이 착잡했다. 이십오 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로 나는 골프장에 한 번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휠체어 신세를 지기 전에는 나도 골프를 꽤나 좋아했다. 나도 너처럼 아버지한테 골프를 배웠고, 함께 골프를 치며 부자지간의 정을 나눴다. 골프장에 간다는 것은 아버지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다는 의미였다. 어린 내겐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골프를 칠 수 없게 되었다는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골프장 근처를 지나칠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그래서 너희 부자가 골프장에 가자고 했을 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네가 아빠와 함께 골프 치는 모습을 보는 걸 포기할 수 없었다. 

 

골프장에 도착한 후, 휠체어를 타고 필드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이 놓였다. 그제서야 잘 가꿔진 환경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골프장 특유의 냄새와 잘 정돈된 푸른 잔디가 주는 푸근함, 필드 사이사이에 점처럼 찍혀있는 벙커들. 영원할 것만 같은 이 풍광을 나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것이다.

 

공을 놓고 스윙을 하는 네 모습을 보았다. 완벽한 자세였다. 공과 하나 된 널 보면서 어느 때보다 네가 자랑스럽고 고맙게 느껴졌다. 페어웨이를 따라 내려가는 동안 난 어린아이처럼 들떠있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골프채를 휘두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두 발로 잔디를 밟고 서서 그 잔디를 느낄 수 있다면…… 목이 메었다. 혼자였더라면 아마 엉엉 울었을 것이다. 두 손으로 골프채를 감싸 쥘 때의 그 느낌, 예전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간절히 하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몇 분 뒤, 네가 가방에서 골프채를 꺼내는 모습을 보면서 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끝없이 펼쳐진 잔디밭과 나무들, 그리고 네가 공을 치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을 되찾았다. 너는 공을 높이 쳐올려서 이십 미터쯤 앞에다 떨어뜨렸다. 네 아빠와 나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나는 다시 기쁨으로 가득 찼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쩌면 내가 사용할 수 있도록 골프채를 특수 제작할 수도 있을 거야…… 어쩌면 휠체어에 앉아 골프채를 휘두를 수 있을지도…… 어쩌면……

 

하지만 아무리 어떻게 한다 해도 예전과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여러 가지로 서투르고 굼뜨고, 그러면 재미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더 고통스럽고 슬펐다.

 

그때 들려온 네 목소리가 나를 고통스런 몽상에서 깨어나게 했다.

 

“아빠, 나이스 샷!”

 

네 덕분에 나는 다시 기쁨과 감사를 느끼며 나를 둘러싼 골프장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너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순간순간 일어나는 일들을 온몸으로 느끼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이 과거로 돌아가 잃어버린 것을 떠올릴 때면 가슴은 고통으로 가득해진다. 또 내 마음이 미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갈망할 때도 역시 고통스럽다.

그토록 많은 어른들이 괴로워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한번 살았던 삶을 다시 살려고 하거나, 이룰 수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날 네가 나에게 일깨워주었다. 우리가 가진 현재의 삶을 살 때, 지금 여기를 살 때 인생이 훨씬 행복해진다는 것을.

 

고맙다, 샘. 

 

 

샘에게 보내는 편지 / 대니얼 고틀립 /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