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제대로 다루어주지 못하면
감정을 무시하면 자존감이 낮아진다
(생략)
화영이는 사귄지 1년이 채 안 된 지훈이를 많이 좋아합니다. 그래서인지 지훈이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합니다. 지훈이는 뭐든 제멋대로여서 약속 시간 바로 전에 못 나가겠다고 전화로 통보합니다. 갑자기 친구들이 만나자고 한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러나 화영이는 화를 내는 법이 없습니다. 화영이는 괜찮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화영이의 생일이었습니다. 한껏 기대를 하고 예쁘게 꾸미고 나갔는데 지훈이는 빈손에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같이 식사를 할 때, 지훈이는 지나가는 한 여성을 불렀습니다. 아는 여자라고 했습니다. 지훈이는 그녀를 테이블로 불러 앉힌 후 즐겁게 얘기를 나눴습니다. 화영이는 마치 투명인간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화영이는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불편했고, 지훈이를 이해해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화영이는 왜 그럴까요? "넌 자존심도 없니?"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억울하고 화날 법도 한데 느끼지를 못합니다.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하지도 못합니다. 말은 못할지언정 뒤에서 화를 낼 수도 있는데 그렇게도 못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성장하면서 다양한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합니다. 교육은 커녕 감정은 외면당하고 무시되기 일쑤입니다. 이렇게 감정이 무시되면 아이는 불안정해지고 자존감이 낮아집니다.
성장하면서 우리는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는데, 살아온 날이 적은 아이들에게 감정은 낯설고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어, 이게 뭐지?' '왜 엄마는 내게 화를 내지?' 그런데 부모가 이러한 감정들을 잘 읽어주고 이해해주고 다뤄주지 않으면, 아이는 여전히 당황스럽고 안정감을 얻지 못한 채 불안정한 상태로 자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느끼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니, 온통 의문투성이이고 혼란스럽기만 한 것이지요.
내 감정을 믿지 못하면, 나를 믿지 못한다.
당신은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믿나요?
□ 감정은 믿어선 안 돼요. 나는 내 감정을 믿지 않아요.
□ 내 감정을 믿어요. 내가 그렇게 느꼈으면 그게 맞는 거예요.
당신은 어떠십니까? 남들에게 끊임없이 물어보며 자신이 경험한 감정이 무엇인지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친구를 찾아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반응을 살핍니다. 친구가 "화났겠네"라고 말하면 그제야 안도합니다. '그래, 화날 만한 거지.'
성장하면서 감정 또한 분화와 발달을 겪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로 뭉뚱그려진 감정 덩어리였던 것이, 다양한 감정들을 경험하고 구분하고 명명하면서 점점 분화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든다고 모두 감정 분화와 발달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 남들이 다 짐작할 수 있는 감정 경험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구분해내지 못합니다.
아이가 감정을 경험할 때 그것은 뭔가 내 마음을 건드리는 것, 뭔가 흥분하게 하는 것, 뭔가 혼란스러운 감정의 덩어리입니다. 그것이 점차 슬픔, 기쁨, 행복, 서운함, 분노, 부끄러움 등의 감정으로 쪼개지고 그 안에서 더 미세하게 구별되어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감정의 분화와 발달은 적절한 피드백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이 과정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직 감정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아이에게 "넌 왜 소리를 지르니? 엄마가 그러지 말랬지!" "왜 울어? 울지마!" "이게 속상할 일이야? 부끄러운 줄 알아"라는 식으로 감정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
그러면 아이는 어떨까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런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느껴선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의 감정이 잘못되었으며 이상한 것으로 여기고 부끄러워하며 심지어 죄책감마저 느낍니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 '화가 나는 것 같은데?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냐?'라며 자신의 감정을 의심하고,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자체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느낌을,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경험을 확신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에 대해 수치스러워하고 감정을 감추려 애쓰게 됩니다.
결국 자신의 감정과 판단에 자신이 없어지면서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되어 낮은 자존감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표현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달래주지 못합니다.
반면 부모로부터 "화가 많이 났구나" "그래, 서운했겠다" "시험을 못 봐서 실망하게 할까 불안하구나" 같은 말을 들은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과 판단에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자신만 겪는 이상한 경험이 아니라 같은 상황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경험이라는 이해와 함께 안도감이 듭니다. 또한 다시 비슷한 상황 또는 새로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비추어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상황을 이해하며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속에서 욱하고 올라오는 걸 보니 난 지금 화가 난 거야. 그래. 내가 화가 난 것은 아까 그 애가 내 물건을 함부로 가져갔기 때문이야. 화가 날만도 해. 가서 내 물건을 달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다시는 내 물건을 가져가지 말라고 얘기해야지.'
이렇듯 아이는 자신 있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안정적이고 자존감 높은 아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때그때 느끼고 표현하면 마음이 건강해진다.
자,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감정은 해소되면 사라지니 그때그때 느끼고 표현하면 됩니다. 간단하지요? 그런데 과연 쉬울까요? 살다보면 감정을 표현할 수 없을 때가 더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갑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거나 서로 보이는 모습을 관리해야 하는 공적인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감정표현이 자신에 대한 정보 노출로 이어져 이용을 당하기도 하고, 자신의 이득에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또 감정의 표현은 상대방에게 부담감을 줄 수 있고, 그로 인해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감정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를 들어 보셨을 겁니다.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얘기입니다. 나이가 들면 자신보다 사회적 위치가 낮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가 많아지고, 감정 표현은 그들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수라면 학생들이 있을 테고 상사라면 부하직원들이, 부모라면 자녀들과 며느리나 사위가 있겠지요.
당신은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당신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 충족시켜서 좋은 관계를 얻어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거나 보호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감정을 표현하고 해소할 수 있는 상황에서조차 스스로 그 기회를 저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해소되지 않은 감정을 양산할 뿐입니다. 또한 감정을 억누르는 자체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감정의 방향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게다가 이후 해결을 위한 에너지가 추가로 들어가기 때문에 이중으로 에너지를 낭비하는 셈입니다.
매순간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표현해도 괜찮은 감정인지 아니면 주변에 부담이나 피해를 줄 수 있는 감정인지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자리가 감정을 표현해도 괜찮은 자리인지를. 만약 특별히 감출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면, 당신의 감정을 그대로 느껴 보세요. 얼굴에 드러내고 몸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표현되도록 내버려 두세요. 그것이 건강한 마음입니다.
[나는 왜 감정에 서툴까? / 이지영 저/ 청림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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