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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건강자료실)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

딸기라때 2024. 10. 1. 06:53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


  '대충 듣기만 해도 속 마음 견적이 쫙 나와야 실력 있는 정신과 의사가 아닌가' 묻고 싶은 사람이 있을 거다. 아니다. 그건 실력이 없는 거다. 찬찬히 묻지 않고 자세히 살피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을 재단하는 건 선무당이나 하는 짓이다.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 현상만으로 한 존재를 해석하고 판단하고 규정한다면 그건 선입견이나 편견을 바탕으로 넘겨짚은 것이기 쉽다.

정서적 공감 vs 인지적 공감

  자세히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공감할 수 있다. 척 보고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것이 공감의 본질이 아니다. 그런 것은 무릎 반사 같은 감각적 반응일 수도 있고 감정적 호들갑일 때도 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깊은 이해로 연결되지 않은, 순간적으로 폭발한 감정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감정적 반응 그 자체가 공감은 아니다. 한 존재가 또다른 존재가 처한 상황과 상처에 대해 알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존재 자체에 대해 갖는 통합적 정서와 사려 깊은 이해의 어울림이 공감이다. 그러므로 공감은 타고난 감각이나 능력이 아니다. 학습이 필요한 일이다.

  공감을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으로 나눈다면 그 비율이 2:8 정도로, 공감이란 것은 인지적 노력이 필수적인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감에 대한 통념이 있다.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다. 누군가의 상처나 고통을 대면했을 때 그 즉시 감정 이입이 되어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이 공감력 넘치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다면 공감력이 부족한 냉정한 인간이다. 노력하는 공감은 진짜 공감이 아니며 공감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등. 사람들은 공감을 정체를 알 수 없는 순정한 무엇으로 여긴다. 진짜 그런가.

  정서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높은 감수성과 결합된 성숙한 공감력을 말한다. 정서적 호들갑과는 구별해야 한다. 고통을 보고 눈물을 뚝뚝 흘린다고 다 정서적 공감은 아니다. 자식을 잃은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생각보다 얼굴이 밝구나. 이젠 많이 괜찮아졌나 보다"라며 인사를 건네는 행위가 때론 당사자에게 2차 가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제대로 된 공감이다. 그럴 때 친구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아이를 잃고도 잘 살아가는 '차가운 엄마, 엄마 같지 않은 엄마'로 보이면 어떡하나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보이는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더 느낄 것이다.

  악의가 없이도 얼마든지 타인에게 상처를줄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은 배워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면서 자신도 모르게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래서다. 배워야 하는 고통, 배워야 공감할 수 있는 고통이 세상에는 더 많다. 그래야 최소한 그런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다.


  공감은 다정한 시선으로 사람 마음을 구석 구석, 찬찬히, 환하게 볼 수 있을 때 닿을 수 있는 어떤 상태다. 사람의 내면을 한 조각, 한조각 보다가 점차로 그 마음의 전체 모습이 보이면서 도달하는 깊은 이해의 단계가 공감이다. 상황을, 그 사람을 더 자세히 알면 알수록 상대를 더 이해하게 되고 더 많이 이해 할수록 공감은 깊어진다. 그래서 공감은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라 내 걸음으로 한발 한발 내딛으며 얻게 되는 무엇이다.

(중략)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 으레 던지는 "힘들었겠다"는 말은 사람 마음에 의미 있게 가닿지 않는다. 공감적인 단어이지만 공감받았다는 느낌을 상대에게 주지 못하는 건 그 말이 잘 모르고 던지는 말이라서다. 자세히 모르는 사람이 던진 말이 의미 있는 정서적 파장을 만들지는 못한다.

  잘 모르면 우선 찬찬히 물어야 한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시작되는 과정이 공감이다.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조심스럽게 물어야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은 가장 입체적이고 총제적인 파악인 동시에 상대에 대한 이해이고 앎이다.

  그런데 혹시라도 질문을 잘못해서 상대방의 상처를 더 덧나게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주저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보편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혹은 "내가 자세히 몰라서 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 봐 물어보는 건데..." 하는 단서를 달고 상대방의 상황, 마음에 대해 어떤 것이든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된다.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고 존중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내 태도만 명확하게 전달이 된다면 혹시라도 적절하지 않은 질문을 해도 특별한 문제가 없다.

  상처를 덧나게 하는 질문이 따로 있다기보다 상대방에게 던진 질문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거나 오해를 하고 있다는 증거나 나를 비난하는 의도를 품고 있다고 느껴졌을 때 사람은 상처를 받는다. 그러니 그런 마음이 전혀 아니라는 내 입장을 먼저 알려주고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걱정없이 물어볼 수 있다.

(중략)

  다이어트에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식이요법이나 운동하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알아도 꾸준히 실천하기 어려워서다. 이 센터는 자기 몸을 계속 바로보고 의식하게 만듦으로써 단번에 목표에 도달했다. 자기 몸을 ‘거부감이 들지 않고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그러나 또렷하게’ 계속 떠오르게 해서 스스로 해결을 주도하게 만든 것이다.

  공감의 원리도 같다. 질문을 통해서 상대의 상황과 마음이 거울에 비춘 듯 또렷하게 보이면 공감은 절로 일어난다. 공감을 받은 이의 속마음은 더 열리고 자기 기억이나 자기에 대한 느낌들을 더 잘 떠올리고 말하게 된다.

  구석구석 비춰주는 거울처럼, 구석구석 빼놓지 않고 나를 담고 있는 누드 사진처럼 ‘거부감 들지 않고 다정하게, 그러나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공감 유발자다. 자세히 알아야 이해하고 이해해야 공감할 수 있다.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히는 습관이다.

[출처- 책제목 ‘당신이 옳다’ 저자명 ‘정혜신’ 출판사 ‘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