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정말 행복한가
어느 날 문득 ‘나는 정말 행복한가?’라는 질문이 내 마음 속에 비눗방울처럼 살포시 떠올랐다.
당연히 나는 행복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행복하지 않은 것도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행복은 우리가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행복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하나의 단어일뿐이며 그 안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그저 그것은 다른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다.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깊게 생각하는 동안 질문이 바뀌었고 문득 궁금해졌다. ‘이때까지 지내 오면서 나는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 언제였을까?’ 가장 즐거웠던 날! 웃음이 절로 나온다. 기분이 좋고, 어느 때보다 순수하고 고귀한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내 기억 속에는 열 개, 백 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나름대로 아름답고,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수많은 기억들이 끝없이 떠올랐다. 얼마나 많은 햇살이 내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얼마나 많은 강물들이 내 몸을 식혀주고, 얼마나 많은 길들이 나를 인도해 주고, 얼마나 많은 시냇물이 내 곁을 흘러갔던가! 나는 파란 하늘을 얼마나 자주 올려다보았고, 도저히 잊을 수 없을 만큼 얼마나 생동감이 넘쳤으며, 사람들의 사랑스러운 눈망울을 얼마나 자주 보아 왔던가! 또 얼마나 많은 동물들을 사랑해 왔었나! 그런 순간들을 되새겨 보면 그것들은 다른 어느 순간보다 아름다웠다. 물론 찻잔을 서서히 비우고,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는 지금 이 순간도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정말 그렇다! 나는 계속 꿈을 꾼다. 아, 저 기억의 바다에서 다른 그림들이 솟구친다. 고통의 시간, 슬픔의 나날, 부끄러움과 후회로 얼룩진 기억, 실패를 경험한 순간, 죽음을 느꼈던 공포의 기억들이다. 첫사랑의 아픔에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던 날도 생각난다. 어느 날 누군가 내게 찾아와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서 임종하셨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주던 날, 젊은 시절의 절친한 친구가 나를 혹독하게 비판하던 밤, 열정 어린 작업으로 작품들은 많아졌지만 빵을 살 돈이 없어 난감해하던 청춘, 사랑하는 친구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절망하는 것을 그저 옆에서 바라보기만 할 뿐 도와주지도 못하고 위로하지도 못한 채 고통을 줄일 수 없었던 수많은 시간들.
돈이 아주 많고, 나보다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기는 듯한 태도로 대할 때, 그저 움켜쥔 주먹을 숨기며 감정을 억눌러야 했던 순간들, 어느 모임에 참석했을 때 낡은 양복의 꿰맨 부분을 애써 손으로 가리려고 했던 일, 잠 못 이루던 긴긴 밤을 견뎌야 했던 기억과 마음속에 슬픔이 가득 차 있는 것을 감추려 애써 장난을 치며 지나간 시간들, 절망적인 사랑과 어느 것도 믿을 수 없었던 참담한 순간들, 그리고 진행하던 일이 잘되지 않아 스스로를 책망 해야만 했던 일, 우상을 잃어버리거나 어떤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던 일.
기억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나 그 수많은 순간들 중에서 어떤 것은 기억속에서 지워 버리고, 어떤 것은 잊어버리고, 어떤 것은 새롭게 되새겨야 하나? 그 어떤 것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아무리 씁쓸한 경험이라도 안 된다.
(중략)
우리는 누구나 무의식 중에 그런 과정을 되풀이한다. 누구나 유년기를 떠올리면서 그 시절 겪었던 자질구레한 것들을 모두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물든 파란 하늘에 펼쳐 놓은 환상적인 기억만 떠올린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이미 지나가버린 날들의 쾌락을 되새기는 것은 그 맛을 다시 곱씹는 일일뿐만 아니라 행복의 모습, 그리움의 기억, 천상의 모습으로 승격한 추억들을 항상 새롭게 즐길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 삶에 대한 놀라운 열정과 따스한 온기, 그리고 눈부신 햇살이 그 짧은 순간에 얼마나 많이 표현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날에 주어지는 선물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받아들이려고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아픔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 아무리 큰 시련이 닥쳐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암울했던 날에 대한 기억도 아름답고 성스러운 기억의 한 토막이 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책제목 ‘삶을 견디는 기쁨’ 저자명 ‘헤르만헤세’ 출판사 ‘문예춘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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