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이 필요한 순간
“와,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네!”
“에이, 컵에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드는 비유의 정석. 우리는 반 컵의 물을 가지고도 행복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배웠다. 또는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되라고 거의 반 강요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허점이 하나 있다. 물이 반 컵 담겨 있어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에는 ‘채움’만이 만족감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전부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왜 물이 ‘채워진 것’만을 긍정적인 쪽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비워진 것’을 긍정하면 안 되는 걸까? 애초에 무언가가 채워져 있어야만 긍정적일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비워진 50%를 눈으로 뻔히 보고도 적당히 만족하라는 것이냐는 말이다.
관점을 거꾸로 돌려 보자. 만약 빈 컵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컵이 반이나 비었네!” 혹은 “에이, 컵이 반 밖에 안 비었네.”
이 경우엔 ‘비워진 것’을 긍정하게 되는 것이므로 반대로 완전히 빈 컵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지 못할 수도 있다. 만약 컵에 꽃을 꽂아 두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어떨까. 아마 그에게는 완벽한 양의 물이 든 컵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긍정적인 면을 볼 줄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다. ‘긍정적인 것’의 정의를 ‘채움’이나 ‘비움’ 어느 한 쪽으로도 규정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족하기 힘든 상황에서 무조건 긍정적인 쪽을 보는 사람이 되라고 하기보다는 ‘긍정적인 것’의 범위를 넓힐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한다. 세상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생각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모양의 만족감을 얻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손가락 지문 하나 나와 똑같은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모두가 같은 상태로 행복할 수 있겠나.
그러니 컵에 물이 반이나 남은 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관점에 대해 한 가지의 답만을 정해버리는 것일지 모른다. 항상 무언가 채워져 있어야만 만족스러운 상태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때로는 채움보다 비움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게으른 게 아니라 충전 중입니다. / 댄싱스네일 / 허밍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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