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건강

피할 수 없으면 미뤄라, 회피행동

딸기라때 2023. 12. 14. 08:40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입대나 어려운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처럼 힘들어서 가능하면 피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많이 쓰는 말입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기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즐기는 것 말고 또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어떨까요? 바로 ‘미루기’입니다.

제출해야 하는 과제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전날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밤새 했던 적, 나가고 싶지 않은 약속이지만 거절하기 어려워서 계속 미뤘던 적, 문자나 톡이 온 것을 알지만 확인하지 않고 며칠 동안 답장을 안 했던 적 등 미루기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다양하게 있을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행동을 ‘회피행동(Avoidance Behavior)’이라고 합니다. 회피행동은 위협이 되거나 어렵다고 판단하는 상황이나 대상, 생각 등을 피하거나 관여하지 않는 것, 또는 이미 개입한 상황이나 대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회피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진화적 관점에서 봤을 때 회피행동은 생존과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독풀을 만져서 아파본 경험, 맹수로부터 생명을 위협받은 경험을 하면서 우리 기억 속에는 독풀이나 맹수는 피해야 한다고 각인됩니다. 만약 이런 기억이 저장되지 않고 회피행동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많은 희생자가 생겨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회피행동은 불안,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함께 우리가 위험을 인지하고 안전을 추구하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사냥이나 채집을 직접 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 대신 매일 일터에서 많은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가족들과 또는 혼자만의 개인적 삶을 영위합니다. 이렇게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우리가 두려움이나 불안, 회피행동을 보이는 대상도 달라졌습니다. 맹수, 독풀, 절벽과 같은 자연뿐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상사, 동료, 가족, 처리해야 하는 업무 등이 회피행동의 목록에 포함된 것이지요.

업무적으로 상사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난 뒤,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실패해 조직에서 심한 질타를 받고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난 뒤, 믿었던 친구나 가족,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난 뒤 우리는 많은 실망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해당 사건이나 대상, 관련된 생각들을 피하고 싶어집니다. 상사에게 꾸지람을 받았던 장소나 해당 상사를 피하기도 하고, 실패한 프로젝트를 떠올리는 문서를 열람하는 것을 피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바람을 피워 헤어진 연인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그 사람과 갔던 장소들은 가급적 가지 않으려고 하기도 합니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에게서는 이런 회피행동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트라우마 당시를 떠올릴 때마다 엄청난 신체적, 심리적, 인지적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에 그와 연관된 모든 것들을 차단하고자 합니다.

이런 회피행동은 자기 보호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힘들고 아프게 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안전감, 통제감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회피행동은 어느 정도 그런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또, 심리적, 신체적 내상이 깊고 내상이 생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또는 직면하는 것이 더 큰 갈등이나 문제를 유발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얼마간 회피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회피행동이 장기간 지속되면 습관화될 수 있고, 자신을 주변으로부터 고립시키고 더 많은 기회와 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회피행동이 더 나은 커리어 선택, 승진, 사회적 관계 형성, 능력과 잠재력 발휘와 같은 가능성의 싹을 잘라버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고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신체적, 심리적 증상을 악화시키기도 하고, 약속이나 계획을 마지막에 취소해 주변 사람들에게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답이 없는 문자나 전화에 지친 친구와 연인이 관계를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회피행동이 우리 삶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잠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 팁을 알려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진_ freepik

1. 회피행동을 정의하기

회피하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왜 회피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정리해보는 것입니다. 회피행동의 기저에 자리하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 신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회피행동이 주는 이익과 손실을 따져보면서 회피행동을 명확화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회피행동이 주는 이익보다 손해가 크다면 회피행동을 멈춰야 한다는 인식을 분명하게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당장 회피행동을 멈추기가 어렵다면 얼마나 지속할 것인지, 그 후에는 어떤 단계로 회피행동을 멈출 것인지 계획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2. 회피행동이 주는 영향 살펴보기

회피행동이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면서 회피행동을 했을 때 나는 어떻게 느끼는지,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살펴보세요. 회피행동이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변화를 위한 의지가 더 생길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 회피행동에 관해 물어보면서 변화를 위해 필요한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좋습니다.

3. 회피 대신 실행하는 나의 모습 그리기

회피하는 대신 무언가를 실행에 옮겼던 마지막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떠올려보세요. 그때 느꼈던 감정은 무엇이었나요? 미루고 회피하는 대신 실행에 옮기고 도전해서 성공하는 나, 보람을 느끼는 나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힘들고 지칠 때,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을 만났을 때는 잠시 쉬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피하고, 미루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지친 나를 돌아보고 같은 상처를 받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다시 시작할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잠시간의 휴식 후에는 언젠가 다시 일어나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찾아옵니다.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을 마주하며 삶을 계속 이어갈 때, 과거의 경험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힘들고 어려워도 새로운 길 위에 나설 때, 미루고 피하기만 했다면 알 수 없었을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하며 계속해서 걸어갈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