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사
스스로를 보살피고 돌보는 일
얼마 전 야구 중계를 보다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왕년에 장타자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여러 팀을 전전하는 신세가 된 한 베테랑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앞선 타석에서 신인 투수에게 삼진을 당했다. 오늘따라 스트라이크와 볼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공이 한가운데로 몰려도 자신 있게 배트를 휘두르지 못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마음이 평정하지 못하면 평소와 다른 소리를 낸다고 했던가.
배트가 공에 닿지 않고 허공을 가를 때마다 그의 입에선 “앗!” 하는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선수 출신의 해설자가 말했다.
“아, 오늘 정말 안 좋아 보이네요. 몸은 물론이고 심리적인 상태도 별로인 것 같아요. 스윙할 때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네요.”
캐스터가 물었다.
“오랜 기간 선수 생활을 하셨잖아요. 경기가 안 풀리는 날엔 어떻게 하셨나요?”
“글쎄요. 특별한 방법 같은 건 없었어요.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날은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그냥 버티는 게 목표였어요.”
살다 보면 유난히 몸과 마음의 상태가 좋지 않은 날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날이면 우린 두 개의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곤 한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안간힘을 쓰기도 하고, 긴 한숨과 함께 “일이 잘 풀리지 않네”라고 푸념하면서 아예 모든 걸 내려놓기도 한다.
둘 다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심신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몸을 혹사하다가는 자칫 과부하로 끊어지는 퓨즈 같은 신세가 될 수도 있고, 스스로 자포자기하며 크게 나자빠지게 되면 훗날 다시 몸을 일으킬 땐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만 한다.
다른 선택지는 없을까? 어쩌면 너무 잘하려고 몸부림을 치기보다 스스로 심신을 돌보면서, 평소에 비해 크게 처지지 않는 결과를 내는 것을 목표로 그럭저럭 버티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는 “버틴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는 사람을 자기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수동적이고 미온적인 사람으로 취급한다.
온당하지 않은 평가다. 우린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이 일반화된 시대를 건너가고 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요즘 같은 때에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는 믿음으로 마음을 떠받치며 현재를 견디는 것은 단순한 기다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어떤 면에서 현재를 꿋꿋이 버틴다는 건 몸과 마음을 건사하면서 후일을 도모한다는 걸 의미한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더라도 와르르 무너지지 않고 묵묵히 버티고 있다면, 스스로를 힐난하거나 자책할 필요가 없다.
꾸역꾸역 현실을 견디면서 세월을 건너가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삶은 충분한 의미가 있다.
이기주 / 보편의 단어 / 말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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